'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자막 오역 논란 뒤 숨은 문제점

겨울달 2018. 5. 3.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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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잘 나가도 정당한 비판을 들어야 하는 이유
출처: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개봉 이후 관객들은 영화의 내용만큼 자막 오역 논란에 관심을 보였다. 각종 매체, 블로거, 유튜버들은 영화의 내용을 바꿔버린 번역을 비판했다. 일반 관객까지 영화를 보고 인터넷에 검색할 만큼 논란이 커지고 급기야 박지훈 번역가의 작품(번역) 참여를 반대하는 국민청원까지 등장했다. 결국 수입배급사인 월트 디즈니 코리아가 상황을 설명했지만, 상황이 수습되기는커녕 더욱 악화됐다.

번역가의 의도가 어찌 됐든, 논란이 된 번역 중 일부는 확실히 틀린 것이 확인됐다. [인피니티 워] 조 루소 감독은 30일(현지시각) 아이오와 주에서 Q&A 행사를 가졌다. 감독의 지인이 근무하는 고등학교의 학생들이 참석해 영화와 관련한 내용을 질문했는데, 이를 통해 3가지 사항이 잘못 번역된 것으로 드러났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토르와 가디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우주선을 파괴하고 내 백성 절반을 죽였다.”라고 말했으나, 우리말 자막에는 ‘절반’이란 표현이 없다. 조 루소는 [토르: 라그나로크]의 발키리가 살아 있고, 아스가르드 난민 일부가 구명정으로 탈출했다고 밝혔다. 생존한 아스가르드 인이 있는 것이다.

2) 타노스가 파워스톤을 손에 넣는 과정을 설명하는 말도 오역됐다. 토르는 “파워스톤을 손에 넣으며 잔다르를 학살했다.”라고 말하지만, 우리말 자막은 ‘잔다르에서 파워스톤을 훔쳤다.’라고 나온다. 루소 감독은 타노스가 잔다르를 침공한 것이 맞으며, 영화 시간과 영상 반복을 피하기 위해 이 부분은 촬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3) 가장 화제가 된 부분은 닥터 스트레인지의 대사 “We’re in the endgame here.”를 “이제 가망이 없어.”라고 번역한 것이다. 루소 감독은 모든 미래를 본 스트레인지가 타노스에게 이기기 위해 타임스톤을 넘긴 것이라 말했다. 결국 ‘endgame’은 승리를 위한 최종 단계로 이해할 수 있지만, 자막 표현에는 이러한 의미가 배제됐다. [어벤져스 4]의 포석을 여는 중요한 대사를 완전히 다르게 해석한 것이다.


출처: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마블 영화의 자막 번역 오류 논란은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몇 년 동안 박지훈 번역가가 맡았던 마블과 DC 슈퍼히어로 영화는 개봉 시기마다 오역 논란에 휩싸였다. 그의 번역은 설정을 왜곡하거나 캐릭터의 성격을 바꾸는 것은 물론, 성차별, 인종차별적 의미를 내포한 표현을 쓰거나 ‘관객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로 표준어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몇 년간 같은 시리즈를 도 맡았음에도 퀄리티가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외화 자막 번역의 1차 목표는 관객이 영화를 정확히 이해하도록 돕는 것인데, 그 자체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자막 번역을 관리하는 수입배급사의 역할에도 의문이 생긴다. 개봉 전까지 수없이 고치고 다듬어 내놓는 자막에서 오류가 나오는 건 확인 과정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입배급사는 외부 프리랜서 번역가가 제출한 자막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몇 년 간 동일한 문제가 계속 반복된다면 한두 번 실수라 핑계 댈 수 없다. 내부 검수 시스템이 미흡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특히 지적받는 내용 중 다수가 영어 실력보다 작품의 이해도가 더 중요한 부분이라, 번역가와 감수 담당자가 오역을 지적하는 팬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모른다는 의심까지 갖게 한다.

자막 번역 논란은 수입배급사가 시장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있음을 증명한다. 마블 영화는 그저 한 편짜리 블록버스터가 아니라 이야기가 이어지는 영화 19편, 햇수로 10년이 된 거대한 시리즈다. [아이언맨] 개봉 때부터 지금까지 영화를 챙겨본 팬을 비롯해 시리즈 자체에 충성도 높은 관객이 많다. 열정적인 팬들은 마블 영화를 끊임없이 보고 즐기며, 파생 콘텐츠를 만들고 홍보에도 직접 나선다. [인피니티 워]의 몇 백만 관객 중 얼마 되지 않지만, 이들이야말로 영화를 평가하고 입소문을 내는 오피니언 리더다. 자막은 일반 관객들에게 가이드가 될 ‘말’을 만드는 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 알기 때문에 생략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번역 오류도 바로 잡아낼 만큼 잘 아는 사람들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도록 정확하게 표현해야 한다.


출처: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수입배급사의 안이한 대응도 논란을 필요 이상으로 키웠다. 인터넷 상에 오역 정보가 돌아다니고 비판의 목소리가 높은데도 수입배급사는 “오역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번역을 할 때 정답은 없는 것 같다.”라고 말하며, 극장판 자막을 수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이는 팬들의 화를 더 돋웠다. 수입배급사가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어설픈 변명으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의도가 눈에 빤히 보이기 때문이다. 오류가 있었다고 솔직하게 밝히고 해프닝 정도로 수습할 수 있었지만,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지금의 사태는 수입배급사가 ‘오역 논란’ 자체를 위기로 인식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몇 년 전부터 오역에 정당한 비판이 제기됐을 때 심각성을 인지해야만 했다. 자막 번역가를 교체하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수입배급사의 책임이다. 하지만 수입배급사는 번역가를 믿고 작업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이런 일이 없게 하기 위해 검수 시스템을 수립하고 결과물을 꼼꼼하게 확인해야 했다. 기업이 현실적 한계 안에서 최선의 조치를 취했을 거라 믿지만,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자막까지 논란이 된 것을 보면 대책이 있었는지, 그리고 대책이 실효성이 있었는지 의심된다.

결국 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잘못을 인정하고 대책이 있음을 알려야 한다. 당장의 문제에 대해서는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며, 여러 문제로 극장 자막 교체가 어려움을 사람들에게 충분히 알리고 설득해야 한다. 대책도 필요하다. 자막 오역 부분은 향후 VOD를 발매할 때 수정하겠다고 말하고, 나아가 번역가를 교체할 계획이 있다거나 내부 검수 시스템을 충분히 강화해 재발을 방지하겠다고 말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한국 영화 시장과 마블 영화를 사랑하는 한국 관객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야 한다. 한국 영화 시장은 크지 않지만 관객은 세계에서 가장 예민하며, 팬들은 충성심이 높은 만큼 작은 이슈에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이들을 ‘이미 확보한 소비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만족시켜야 하는 고객이자 함께 갈 파트너로 바라보고 전략을 세운다면, 앞으로 영화의 흥행과 기업의 평판이 거꾸로 가는 상황은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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