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칼럼] 오손 웰스, 마지막 유작 완성을 위한 복잡한 여정

에그테일 입력 2018. 11. 7.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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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그테일 에디터: 번역 Tomato92, 편집 Jacinta)

*벌쳐(Vulture)와 리프린트 계약을 맺고 번역한 콘텐츠를 편집한 글입니다. 

출처: 넷플릭스

지난주 넷플릭스에 공개된 오손 웰스의 미완성 유작 [바람의 저편]은 할리우드 영화 산업 종사자들이 알만한 농지거리에 관한 웅장한 메타 서사를 제시한다. 감독 겸 배우 존 휴스턴이 할리우드 복귀를 노리는 노장 감독 제이크 한나포드로 분하고, 그가 복귀작을 연출하며 일삼았던 성적 약탈을 둘러싼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바람의 저편]은 엄청난 대사량에 환각을 일으키는듯한 연출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실험적인 성 심리학 드라마이기도 하다. 또한 슈퍼 8 카메라 및 16mm, 35mm 카메라를 사용해 흑백과 강렬한 색감의 영상이 교차되어 이미지와 서술 방식의 변화무쌍한 톤을 담아낸다.

이 드라마틱한 모큐멘터리에는 클로드 샤브롤, 폴 마주르스키, 헨리 자글롬, 데니스 호퍼 등 70년대 활동했던 명망 있는 감독들이 극중에서 본인 역할로 출연하며, [마지막 영화관]의 감독이자 웰스의 제자이면서 친구였던 피터 보그다노비치 감독이 한나포드의 제자 브룩스 오터레이크를 연기한다. 영화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을 통렬하게 풍자하는 동시에 유럽 예술 영화를 의도적으로 조롱한다. 한편으로는 유명 인사가 어떤 존재인지 한나포드의 행동을 시시각각 담아내는 기자와 파파라치의 모습을 통해 흥미롭게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 열광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바람의 저편]이 미처 완성하지 못한 유작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1970년 제작을 시작했지만 1976년까지 본 촬영을 끝내지 못한 데다, 오손 웰스가 죽은 지 33년 만에 빛을 볼 수 있었다. 완성된 영화로 나오는데도 엄청난 기술 혁신과 기발한 사고, 합법적인 책략이 필요했다. 영화 제작자 프랭크 마셜은 25세이던 당시 어시스턴트로 영화에 참여했고, 90년대 초반부터는 영화의 완성을 위해 애써왔다. 그는 벌쳐와 인터뷰에서 마침내 영화가 완성됐을 때 믿기지 않는 동시에 상반된 감정이 벅차올랐다고 회상했다. "정말 오랫동안 내 인생의 일부를 차지했기 때문에 시원섭섭한 감정과 함께 '앞으로 뭘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처: RKO Radio Pictures

70년대 초반, [시민 케인]으로 명성을 얻었던 오슨 웰스는 광고 감독으로 일했던 시절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추락했다. 뿐만 아니라 재앙에 가까운 결정이 이어지면서 갖고 있던 돈도 모두 잃었다. 그는 60년대에 이탈리아로 건너가 완성하지 못한 영화 [돈키호테]를 찍고, 돈을 구하기 위해 프랑스와 유고슬라비아에서 연기를 했으며,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카프카의 심판]을 연출했다. 60년대 후반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그동안 모은 돈으로 '바람의 저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바람의 저편]은 유럽으로 도피했던 술꾼이자 독설가 제이크 한나포드가 복귀작을 연출하고자 할리우드로 돌아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오슨 웰스는 자전적인 영화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제작 과정은 험난했다. 영화의 배경은 할리우드였지만 촬영 장소는 파라마운트 스튜디오의 야외 촬영 부지부터 애리조나 케어프리에 있는 저택, 베벌리 힐스에 있는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자택, 코네티컷, 네덜란드, 스페인, 벨기에 등 다채롭다.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 스튜디오 야외 촬영 당시에는 제작진을 영화과 학생이라 속여 하루당 200달러의 대여비를 냈고, 웰스는 밴을 타고 몰래 스튜디오에 잠입했다. 영화의 절반은 L.A, 나머지 촬영분은 3년 후 두 개의 대륙을 전전하며 찍을 계획이었다. 당시 웰스의 여자친구이자 크로아티아 출신 조각가 겸 배우 오야 코다르가 영화 속 한나포드의 차기작에서 과격한 성격의 이름 없는 원주민 캐릭터를 연기했다. 영화에서 대부분 전라로 돌아다니던 코다르는 웰스와 함께 각본을 썼으며, 작품 속에서 대화가 없는 에로틱한 장면의 일부를 연출했다. 

웰스는 260만 달러의 예산이 집행된 8주간의 촬영 기간 동안 제작비를 조달하기 위해 촬영을 중단하고 TV 드라마 및 영화, 광고를 촬영했다. 엄청난 액수의 세금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중에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업체와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유럽의 한 후원 기업에서 예산의 수십만 달러를 횡령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됐다. 그 여파로 장소 허가를 받지 않은 채 촬영을 감행하고, 영화과 학생 및 인턴을 모집해 무급으로 일을 시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배우들에게는 대본에 없는 대사를 즉흥적으로 해도 된다고 권장했는데, 존 휴스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존, 대사를 그대로 읽거나 아니면 다 잊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결국엔 아이디어가 중요한 거니까." 영화에서 한나포드가 "다른 사람의 것을 빌려오는 건 괜찮지만, 우리의 내면에 있는 것을 차용해서는 안 돼!”라고 말하는 장면을 생각하면 무척 아이러니하다. 영화 초반부에 자동차 뒷좌석에 앉은 기자가 한나포드에게 "카메라 렌즈가 현실을 반영한다고 보나요? 아니면 현실이 카메라의 반영인가요? 카메라는 단지 남근의 싱징일 뿐일까요?"라고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 당시에는 뜬금없이 들려도 영화가 끝난 후에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란 걸 알게 된다(참고로 영화 속 사건의 대부분은 한나포드가 친구, 추종자, 기자, 할리우드 지인을 초대한 70번째 생일 파티장이자 '바람의 저편' 상영회에서 벌어진다).

영화 촬영이 중단됐을 때, 이미 1000개 이상의 릴을 사용한 작품을 40년 이상 못 볼 거라고 예상한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1975년 웰스는 미국영화협회에서 수여하는 평생 공로상을 받는 자리에서 촬영 재개를 위한 자금을 조달할 목적으로 영화의 편집본을 들고 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고, 설상가상 프랑스 영화사와 맺은 계약에 법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영화사는 계약 조건을 빌미로 웰스의 지분을 낮춘 뒤 최종 편집본을 뺏으려는 시도를 했고, 웰스는 영화를 지키기 위해 법정 싸움을 벌이며 자금 조달에 애쓰다가 결국 1985년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바람의 저편] 촬영 감독 개리 그레이버는 이후 영화를 완성하는 것을 인생의 업으로 삼았다. 그는 프랑스 저작권법, 소유권 계약, 법률 및 예술적 권리로 영화를 통제하려는 사람들과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2006년 그레이버가 죽은 뒤에는 그의 친구이자 여러 블록버스터 프랜차이즈를 성공시키며 잘 나가는 제작자로 성장한 프랭크 마샬이 그 횃불을 이어받았다.

또 2008년쯤에는 폴란드 출신의 작가이자 감독, 제작자 필립 얀 림자가 '베니티 페어' 특집 기사에서 [바람과 저편]에 얽힌 복잡한 제작 과정을 알게 되어 회생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그는 저작권 관련 모든 문서를 검토하며, 양도 과정에 관한 300페이지에 달하는 문서를 완성했다.

출처: 넷플릭스

[바람의 저편]이 프랑스에 머물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복잡하게 얽힌 파벌 때문이었다. 바로 영화에 책임이 있는 오야 코다르, 웰스의 딸 비아트리스, 프랑스 영화사였으며, 림자는 이들을 중재하고자 노력했다. 웰스는 사망 당시 코다르에게 영화를 물려주었는데, 비아트리스는 프랑스 민법에 의거해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림자는 당시의 일을 이와 같이 떠올렸다. "판사의 말에 따르면 세 파벌이 서명하지 않는 이상 영화에 손을 댈 수 없는데, 각각의 지분을 임의로 정할 수 없었다. 소유권의 지분을 가늠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상황이 매우 복잡했다. 게다가 그들은 대화조차 거부했다."

이후 꾸준한 설득 끝에 서명을 받는데 성공했으며, 필요한 법적 절차를 모두 밟았다. 그렇게 100시간에 달하는 영상과 여러 개의 촬영 대본, 주석이 달린 메모 등을 회수했다. 회수한 영상의 손상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다행히 문제는 없었다. 다만 뒤죽박죽 섞인 긴 영상을 편집해서 완성하는 것이 문제였다. 림자는 당시 영화를 무사히 완성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100시간이 넘는 영상을 디지털 복원하는데 수개월의 시간이 소요됐다. 그레이버는 막역한 친구이자 [허트 로커]로 아카데미 편집상을 수상한 밥 머로스키를 영입했는데, 그는 미완성 영화를 완성하는 복원 프로젝트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머로스키는 [바람의 저편]을 편집할 때 매우 체계적인 방법을 따랐다. 먼저 모든 촬영 대본과 오손 웰스에 관한 저서 및 인터뷰를 꼼꼼히 정독했고, 그의 영화를 보며 편집법을 익혔다. 

모로스키는 벌쳐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손의 사고방식을 체득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촬영 프로세스를 터득했으며, 그가 이 영화를 통해 성취하고자 했던 바를 고심한 끝에 마침내 감독이 하고 싶었던 걸 깨달았다. 오손은 이 영화를 통해 '다시 정상에 올라서려고 노력하는 노장 감독'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가 영화를 마무리하지 못한 원인 중 하나는 각기 다른 영화 포맷을 사용하고 편집하면서 기술적인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인 것 같다. 장면 편집을 위해 16mm로 찍은 장면을 35mm까지 확대해야 했을 것이다."

[바람의 저편]에 출연한 피터 보그다노비치는 '웰스 영화의 학자'라는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웰스는 그에게 만약 영화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게 된다면 작품의 마무리를 따로 부탁하기도 했다. 보그다노비치는 마샬과 림자가 [바람의 저편] 배급권과 관련해 방송국과 계약을 진행하던 2008년에 책임 프로듀서로 합류했다. 프랭크 마샬은 "피터의 참여가 중요한 이유는 존경받는 감독이면서 [바람의 저편]에 출연했고, 오손과 직접적인 교류를 하는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마무리를 부탁받았을 뿐 아니라 감독의 의도를 이해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밥, 필립, 피터,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사람의 협업으로 가능했으며, 이중 두 사람은 직접 출연했기에 작품에 연관성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존 휴스턴의 아들 대니 휴스턴은 버번으로 적신듯한 아버지의 목소리를 훌륭하게 재현하며 영화의 후시녹음에 도움을 주었다. 프랑스 작곡가이자 오손의 마지막 완성작 [거짓의 F]에서 음악을 담당한 미셀 르그랑은 실험적인 재즈풍의 사운드트랙을 완성했다.

당초 지난 5월 칸영화제에서 처음 공개할 목적으로 올봄까지 모든 작업을 끝냈지만, 영화제측과 넷플릭스의 갈등으로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다. 이런 시련에도 [바람의 저편]은 베니스영화제에서 공개되어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바람의 저편] 제작자들은 마침내 기나긴 여정을 끝내고 웰스의 열성팬들을 불러 모았다는 승리감이 들었음에도 그 모든 노고에 시원섭섭한 끝맺음을 알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피터 보그다노비치는 텔루라이드영화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말 슬프다. [바람의 저편]은 슬픈 이야기가 담긴 애석한 작품이다. 이는 오손의 유작일 뿐 아니라 '모든 것에 종결을 선언하는' 그런 작품이다. 이 영화에 유일하게 존속하는 것은 오손 웰스의 예술성뿐이다."

바람의 저편The Other Side Of The Wind평점7.57.5점
감독
오손 웰스
출연
폴 마주르스키, 스테판 오드랑, 메르세데스 맥캠브리지, 헨리 자글롬, 로버트 랜덤, 토니오 셀워트, 에드먼드 오브라이언, 클로드 샤브롤, 폴 헌트
장르
코미디
개봉
오손 웰스Orson Welles
수상
1971.아카데미상 명예상 외 2건
작품
워터루(1970), 버터플라이(1982), 007 카지노 로얄(1966), 배틀 포스(1977), 공포 속의 여행(1942), 리어 왕(1953), 캐치 22(1970), 쇼군(1980), 사랑의 나날들(1987), 아우스트리츠의 영웅(1960), 머펫 무비(1979), 디프(1970), 너의 토끼를 알게 되다(1972), 쿠브라이 칸(1965), 모두가 진실이다(1993), 남쪽 별(1969), 다윗과 골리앗(1961), 지나의 초상(1958), 투 머치 존슨(1938), 돈키호테(1992), 흑장미(1950), 길고 긴 여름날(1958), 타인의 도시(1967), 로스트 인 라만차(2002), 순결(1963), 트랜스포머 더 무비(1986), 제3의 사나이(1949), 시민 케인(1941), 네레트바 전투(1970), 사계절의 사나이(1966), 백경(1956), 맥베드(1948), 더블 맥거핀(1979),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1966), 상하이에서 온 여인(1947), 오손 웰스의 이방인(1946), 행복을 파는 기계(1985), 위대한 앰버슨가(1942), 카프카의 심판(1962), 제인 에어(1944), 바이킹(1958), 오델로(1952), 오손웰즈의 보물섬(1972), 강박충동(1959), 스페인의 대지(1937), 심야의 종소리(1965), 불멸의 이야기(1968), 악의 손길(1958), 거짓의 F(1973), 바람의 저편(2018), 젊음의 원천(1956), 미스터 아카딘(1955), 여우들의 왕자(1949), 12 + 1(1969), 어라운드 더 월드 오브 마이크 토드(1968), V.I.P.s(1963), 오이디푸스 더 킹(1968), 에지 오브 아웃사이드(2006), 내일은 영원히(1946), 감독 존 포드(1971), 앤드 덴 데어 워 넌(1974), 라 리오코타(1963), 오손 웰스: 섀도스 & 라이트(2015), 오슨 웰스와 일하며(1993), 리틀 히어로 몽구스(1975), 열흘간의 불가사의(1971), 쓰리 케이시즈 오브 머더(1955), 살인광 시대(1947), 천지창조(1966), 킹 메이커(1999), 더 매그니피센트 앰버슨스(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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