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살, 프랑스 낭시로 떠났다 <뷰티풀 데이즈> 윤재호 감독

박꽃 기자 2018. 11. 28.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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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박꽃 기자]


2001년, 21살이던 윤재호 감독은 무작정 프랑스 낭시로 떠났다. 파리 근교의 낭시는 그의 말처럼 “잔 다르크가 태어난 곳” 이상으로는 국내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소도시다. 부산 토박이인 데다가 불어 한마디 하지 못했던 윤 감독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지만, 일상 잔류보다는 새 삶을 택했다. 늘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어울리던 지역 사회에서 벗어나 다양한 인종과 정체성의 친구를 사귀어 보니 그제야 사람 냄새가 이런 거구나 싶었다고 한다. 영화를 배우고 직접 찍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이렇다 할 대책 없이 떠난 먼 타지에서 좋아하는 일을 찾아낸 그가 꽤 용감하다고 느껴지겠지만, 놀라기엔 조금 이르다.

윤 감독은 유학 생활 도중 파리의 민박집에서 우연히 만난 조선족 아주머니의 사연을 듣고 단편 영화 <약속>(2011)을 만든다. 불법 체류자 신분인 까닭에 9년째 친아들을 만나지 못했다는 아주머니 대신 그의 아들을 직접 만나보기로 한 그는, 곧장 프랑스에서 중국으로 건너간다. 또 다른 단편 영화 <북한인을 찾아서>(2012)를 촬영할 때는 한국에서 배를 타고 중국 단둥으로, 다시 청도와 상해로 이동하는 여정을 담았다. 다큐멘터리 <마담B>는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탈북 여성 ‘마담B’의 한국행을 뒤따라 라오스와 태국을 거치는 수개월의 궤적을 보여준다. 이나영을 주연으로 한 극영화 <뷰티풀 데이즈>는 이 과정 끝에 탄생했다. 그는 어떻게 이토록 엄청난 행동력을 보여주게 된 걸까?

프랑스에서 오랜 시간 유학했다고 들었다.
나는 부산 토박이였다. 어느 날 매일 같은 사람들끼리 어울려 지내는 부산이라는 도시를 떠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라 모르겠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낭시라는 지방으로 떠나기로 했다. 나중에 그곳이 잔 다르크가 출생한 소도시라는 걸 알게 됐지만, 처음에는 그곳이 프랑스인지도 잘 몰랐다. 거기서 학교를 등록하고 불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게 2001년, 21살 때 일이다.

그곳이 당신에게 영화감독의 꿈을 심어준 공간이라고 봐도 될까.
머물던 기숙사 근처에 한국으로 치면 한국예술종합학교 같은 곳이 있었다. 그곳에서 영화를 알게 됐고, 영화 마니아가 됐다. 이후부터는 허무했던 삶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찾았다고 해야 할까. 모든 인종이 섞여 있는 곳에서 지내다 보니 사람 냄새를 느꼈던 것 같다. 친구들과 함께라면 그 따분하고 지겹다는 프랑스 영화도 재미 있게 볼 수 있었다. 다 보고 나면 이게 대체 뭔 내용이야? 싶었지만.(웃음) 2003년부터는 자그만 단편 영화를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최근 이나영 주연의 극영화 <뷰티풀 데이즈>를 선보였다. 당신이 처음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시점을 돌이켜 보면, 꽤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국내 관객 앞에 선 셈이다.
그 이전까지는 스스로 무언가를 연구하는 개인적인 시간이었다. 남에게 보여주기 힘든 엉망진창 작업이 많았다.(웃음) 2011년부터는 주변에 조금씩 보여줄 만한 작품이 생겼다.

<뷰티풀 데이즈>


예컨대 단편 영화 <약속>(2011) <북한인들을 찾아서>(2012) 등이겠다. 내용을 간단히 설명해 준다면.
<약속>은 우연히 프랑스 파리에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조선족 아주머니를 만난 뒤 찍은 작품이다. 그분은 불법 체류자였고, 그래서 중국에 두고 온 아들과 9년간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나도 가족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그의 심정에 공감했던 것 같다. 영화 작업을 마친 뒤 직접 그의 아들을 보러 갔다.

프랑스에서 중국으로, 직접?
그렇다. 아주머니께 내가 당신 아들을 만나볼 테니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가서 보니… 아들은 이미 한국으로 가 직장생활을 하고 있더라. 아주머니도 그 사실을 나중에 아셨다.

대단한 행동력이다.
그 과정에서 탈북한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됐다. 중국 청도의 청양이라는 도시는 미국 LA의 한인 타운 다음으로 한인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중국으로 이민 온 한인, 중국에서 태어난 한국계 중국인, 일본에서 이민 온 한국계 일본인, 탈북인까지… 한국이라는 땅과 연결된 수많은 사람이 그곳에 있다.

그중 한 명이 당신의 전작 다큐멘터리 <마담B>(2016)의 주인공 ‘마담B’일 것이다. <뷰티풀 데이즈>에서 이나영이 연기한 탈북 여성 역할의 실제 격인 인물이다.
‘마담B’도 중국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는 원래 나를 다른 탈북자에게 소개해주려던 중개인이었다. 밥 한 끼, 인터뷰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인연이 묘하게 이어졌다. 그가 내게 마음을 여는 데 1년쯤 걸린 것 같다. 나를 자기의 중국 집까지 데려갔다. 그곳에서 굉장히 독특한 장면을 봤다.

예컨대.
‘마담B’는 웬 중국인 아저씨와 같이 살고 있었다. 분명 북한에 가족을 두고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이다. 그의 일기장을 읽고 나니 어떻게 된 사연인지 알겠더라. 때로는 나를 투명 인간으로 보나 싶을 정도로 카메라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행동할 만큼 의연했지만, 그의 일기는 내 가슴에 와 닿는 감상을 전해줬다. 탈북한 사람들은 ‘마담B’처럼 일기를 많이 쓴다고 한다. 오늘은 날씨가 어땠고 뭘 먹었는지 같은 대단치 않은 소재지만, 그런 걸 쓰면서 스스로의 행복을 찾아내려는 것 같았다.

<마담B>

 
‘마담B’는 왜 당신에게 자기 개인사를 털어놨을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기의 일상과 삶에 대해서 말이다. 대부분은, 불행히도 그런 기회를 잘 얻지 못한다. 보통은 그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살아왔는지에 대해서만 알고 싶어 한다. 아니면 그들 이야기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려고 든다. 하지만 편견이 많으면 누군가에게 제대로 접근하기 힘들다. 따지고 보면 다 똑같은 사람이다.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뷰티풀 데이즈> 기자회견 자리에서 ‘경계에 선 사람들’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시스템이라는 건 보통 대다수를 위해 만들어진다. 언제든 거기에 속하지 못하는 소수자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민자, 불법 체류자, 탈북자 같은 사람들이 그렇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다들 똑같은 사람이다. 그저 어느 쪽에도 발을 들이지 못하고, 어떤 경계에 서 있을 뿐이다.

<뷰티풀 데이즈>는 <마담B>의 실제 이야기를 토대로 극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은 탈북 여성의 아들 ‘젠첸’(장동윤)으로 바뀌었다.
탈북자의 많은 2세들이 지금 ‘젠첸’의 나이쯤 됐을 것이다. 탈북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중국에서 사는 친구들이 정말 많다. 그중 어떤 아이는 ‘젠첸’처럼 엄마를 찾고, 어떤 아이들은 영원히 찾지 않고 그저 중국인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각자의 선택에 달린 일이다. 하지만 분명 그 아이들 세대가 공통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봤다. ‘젠첸’이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면 내가 전하려고 하는 이야기를 잘 건넬 수 있을 것 같았다.

‘젠첸’은 오래전 한국으로 도망친 엄마(이나영)를 찾아온다. 하지만 한국에서 술집을 운영하며 다른 남자와 함께 사는 그의 모습에 크게 실망하고 이내 중국으로 돌아간다. 이 과정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을 듯하다.
이 이야기를 하다 보면 결국 영화의 스포일러가 될 텐데…(웃음) 가족이란 무엇인지, 그 정의는 누구를 위한 것인지, 가족의 진짜 의미는 어떤 것인지… 그런 것들을 말하고 싶었다. 마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처럼 말이다.

영화의 구성에 관해서도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젠첸’은 이야기의 가장 마지막에 들어서야 엄마의 지난 삶을 알게 된다. ‘젠첸’의 시점을 따라가는 관객 역시 마찬가지다.
그 구성은 단점일 수도, 장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관객이 사건의 전말을 조금 늦게 알게 되기를 바라면서 시나리오를 쓴 건 분명하다. 그래야만 가장 마지막에 대목에서 무언가를 깨닫게 됐을 때 앞부분의 장면을 다시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뷰티풀 데이즈>


사건의 전말을 깨달은 관객에게 엔딩 장면은 약간의 위로가 될 것 같다. 이나영 배우가 이 작품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으로 꼽기도 했다.
<마담B>를 본 관객은 아마 씁쓸한 감정이 앞설 것이다. 답도 없는 질문이 여러 가지 떠오를 테니까. 하지만 <뷰티풀 데이즈>를 본 관객은 그런 씁쓸한 마음을 달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마담B>에 비해서는 반어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을 많이 집어넣은 작품이다. 많은 분이 영화의 숨겨진 메시지를 찾아 주시기를 바란다.

다음 작품 계획이 있는가.
젊은 관객이 보면 좋을 것 같은 호러 영화를 계획 중이다. 아마 흐름은 칸 영화제에 소개된 <드래그 미 투 헬>(2009)과 비슷할 것 같다. 무서운 영화이면서도 당시 미국 사회 모습을 많이 반영한 작품이다. 상업 영화인 만큼 무서움이 주를 이루겠지만 내 영화 역시 전체 비중의 20% 정도는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게 될 것 같다. 3등이면 어떻고 꼴찌이면 어떤가, 스스로 자기 가치를 찾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건네려고 한다.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가족과 식사할 때. 서로 워낙 별말을 안 해서 이럴 거면 뭐하러 같이 밥을 먹나 싶기도 하지만.(웃음) 우리 가족은 내가 프랑스로 떠나던 20대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다만 내가 변했다. 내 변화에 따라 상대가 달라 보이기도 하더라.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고 서로 냄새를 맡는 순간 잔잔한 행복을 느낀다.

뷰티풀 데이즈Beautiful Days평점8.68.6점
감독
윤재호
출연
이나영, 장동윤, 오광록, 이유준, 서현우, 이정준, 최지안, 김현우, 윤재호
장르
드라마
개봉
2018.11.21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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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호 감독 사진 제공_페퍼민트앤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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