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 "미국의 송강호와 호흡 맞췄죠"

나원정 입력 2019. 3. 25. 19:50 수정 2019. 3. 26.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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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BBC '리틀 드러머 걸'로 첫 드라마 연출
국내선 29일 온라인 플랫폼 왓챠 독점 출시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영국 첩보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사진 왓챠]
“6시간 좀 넘는 것 알고 오신 거죠?”
상영 전 무대에 선 박찬욱(56) 감독의 너스레에 300여명 관객이 일제히 웃었다. 지난 23일 서울 씨네큐브 극장에서 열린 그의 첫 드라마 연출작 ‘리틀 드러머 걸:감독판’ 6부작 정주행 시사회는 내내 열기가 뜨거웠다. 응모에만 5만명이 몰려 경쟁률이 160대 1에 달했다.

박 감독이 TV드라마를 연출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실제 영국 첩보원 출신 작가 존 르 카레의 동명 소설에 바탕한 로맨스 첩보물로, 다국적 제작진이 뭉쳐 만든 TV판이 지난해 영국 BBC, 미국 AMC 채널에서 먼저 방영돼 호평을 받았다. 이는 각국 방송규정에 맞춘 버전. 박 감독이 편집권을 갖고 마음껏 매만진 감독판은 이날 시사에서 세계 최초로 선보였다. 이후 29일 국내 온라인 플랫폼 왓챠를 통해 독점 공개된다. 심의가 엄격한 지상파가 아닌 왓챠를 택한 것도 “애초의 의도가 정확히 구현된 버전을 온전하게 구현하기 위해서”라고 박 감독은 설명했다.


이 작품 제대로 만들려고 드라마 도전했죠
자신이 연출한 첫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극장 시사를 위해 23일 서울 광화문 씨네큐브 극장을 찾은 박찬욱 감독. [사진 왓챠]

극의 배경은 1979년 유럽. 영국의 반항적 기질의 연극배우 찰리(플로렌스 퓨)가 우연히 만난 남자 가디(알렉산더 스카스가드)로 인해 이스라엘 정보국의 스파이 노릇을 하게 되며 팔레스타인 분쟁에 휘말리는 얘기다. 조금은 낯선 유럽 정세지만, 현실을 무대로 목숨 건 연기에 나선 찰리의 고뇌와 러브스토리가 인간적인 공감을 이끈다.

이틀 뒤 다시 만난 감독은 “이 작품과 함께한 긴 세월이 이제야 좀 정리되는 기분”이라 했다. “극장에서 6부작을 다 본 게 저도 처음”이라며 “방송판조차 첫 2편만 런던영화제를 통해 극장에서 봤다. 뭔가 미진한 기분이었는데 그저께 감독판을 극장에서 보고 나니 이제야 마무리됐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Q : ‘리틀 드러머 걸’을 제대로 만들고자 TV 드라마 형식을 택했다고.
A : “르 카레 선생의 팬으로 오래 살아왔지만, 이 작품은 아내의 추천으로 비교적 최근에 봤다. 직업 스파이 세계를 비정하고 건조하게 묘사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스마일리의 사람들』 등을 좋아하는데, 그와 달리 평범한 여성 주인공에 로맨스가 있어 처음엔 시큰둥했다. 반쯤 읽다보니 첩보물을 넘어선 심오한 얘기더라.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걸작이었다. 선생의 두 아들을 직접 찾아가 작품을 하고 싶다고 청했다. 영화로 하려면 인물들을 이것저것 다 쳐내야 하는데 그러기엔 아까웠다. 같은 원작으로 1984년 나온 미국 영화를 보니 억지로 줄이면 어떤 참사가 벌어지는지 알겠더라. 미니시리즈가 운명이었다.”


'리틀 드러머 걸' 연출 '공동경비구역 JSA' 덕분
박찬욱 감독이 촬영 현장에서 이스라엘 정보국 역 배우들과 함께있다.맨 오른쪽이 정보국 최고요원 역의 할리우드 배우 마이클 섀넌. 극 중 첩보전의 "감독이자, 제작자이자, 프로듀서"라 자신을 소개하는 모습이 카메라 뒤 실제 감독의 존재를 연상하게 만든다. [사진 왓챠]

Q : 새로 선보인 감독판은 기존 방송판과 뭐가 다른가.
A : “편집 자체가 다르거나, 같은 장면인데 다른 촬영본을 택한 경우도 있다. 방송국과 취향이 달랐던 면도 있고, 영국은 폭력 묘사에, 미국은 노출과 욕설에 엄격하다. 제 입장에선 ‘아무것도’ 못 하는 것이다(웃음). 심하게 자극적인 것은 아니지만 언뜻언뜻 자연스럽게 두고 싶은데 덜어내야 했던 아픔을 감독판에서 다 풀었다. 6부작을 81회차에 찍다보니 정신없이 편집해서 아쉬웠던 부분들도 시간을 들였다. 빨리 냉면 먹으러 돌아오고픈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방송 끝나고도 두 달을 더 매달리며 다시 만졌다. 이 작품은 이것(감독판)으로 남아야 한다는 욕심이 있었다.”

Q : 역사적 비극 속에 개인들의 유대와 고통을 다룬 점은 ‘공동경비구역 JSA’와도 연결된다.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러싼 여러 나라의 여전한 갈등을 외국인 입장에서 다루기가 조심스러웠을 텐데.
A : “해외에선 ‘올드보이’ ‘아가씨’가 많이 알려졌지만 이번에 제가 연출을 맡을 수 있었던 데는 ‘공동경비구역 JSA’가 많이 작용한 듯하다. 실제로 극 중 그려지는 끝없는 분쟁, 뭔가 하나 공격하면 더 크게 앙갚음하며 커져가는 폭력의 악순환은, 한반도에서 살아온 사람으로서 알게 모르게 동병상련이 있었다. 저 나름대로 잘 모르는 역사를 실수하지 않도록 공부도 열심히 했다. 제작사를 통해 영국에 사는 이스라엘‧아랍사람들에게 불쾌한 것은 없는지 물어보며 만들어갔다. 오히려 외부인이기에 객관적이고 날카롭게 다룬 부분도 있었다. 예컨대 영국이 제1차 세계대전 때 팔레스타인 땅을 두고 싸우고 있던 이스라엘과 아랍 양쪽 모두에게 그 지역을 갖도록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원죄’ 같은 것들 말이다.”


주역에 신예, 모사드 역에 스웨덴 배우 파격
주인공 찰리 역의 플로렌스 퓨는 영화 '레이디 맥베스' 등으로 떠오르는 영국의 신인배우다. [사진 왓챠]

Q : 주연 배우 플로렌스 퓨에 대한 호평이 많다.
A : “영화 ‘레이디 맥베스’를 보고 반했다. 아침식사를 청했는데 말도 잘하고 생각이 또렷하더라. 그가 타고난 호기심, 용기, 대담성이 찰리의 위험한 선택들을 납득시켜줬다. 무명의, 막 알려지기 시작한 신인이지만 나와 제작사 모두 그를 맨처음 떠올렸다.”

Q : 상대역 알렉산더 스카스가드는 일부러 고정관념을 깬 캐스팅을 했다고.
A : “처음엔 이스라엘 정보국 모사드 쪽 사람들은 정말 유대인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보일 수 있는 배우를 찾아보려 했는데, 문득 이런 식의 인종적 선입견에 사로잡힐 필요가 있는가, 오히려 그것이 더 위험한 것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알렉산더 스카스가드는 유대인과 가장 거리가 먼 외모라고도 볼 수 있지만 실제 그런 유대인도 얼마든지 있다. 내가 모사드 책임자이고 유럽에서 활동해야 한다면 그처럼 생긴 요원을 뽑을 것 같았다. 이 배우를 좋아하게 된 건 ‘빅 리틀 라이즈’란 TV 시리즈에 니콜 키드먼 남편으로 나와 깊이 있는 연기를 하는 걸 보고서다. 제 영화 ‘스토커’를 함께한 키드먼이 나랑 같이해보라고 많이 얘기해줬다더라.”


마이클 섀넌은 미국 송강호, 미국 유지태는…
왼쪽은 가디 역의 알렉산더 스카스가드. 스웨덴 출신의 할리우드 배우 스텔란 스카스가드의 아들이다. 영화 '레전드 오브 타잔' 주연 등으로 알려진 그를 비롯해 동생 빌도 공포영화 '그것' 등에서 활약하고 있는 배우 집안이다. [사진 왓챠]

작품 전체를 탄탄히 떠받치는 건 이스라엘 고위 요원 마틴 역의 마이클 섀넌이다. 한국에서도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사랑의 모양’, 드라마 ‘보드워크 엠파이어’ 등으로 알려진 배우다. 박 감독은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미국의 유지태라면, 마이클 섀넌은 미국의 송강호”라고 비유했다.

“알렉산더가 단어 하나라도 완벽히 이성적으로 납득해야 연기하는 논리적인 타입이라면 섀넌씨는 본능적이랄까요. 일단 한 번 해봅시다, 하는 모험심이 있어요. 자기 것만 생각지 않고 전체를 보는 눈이 뛰어나요. 자기 장면이 없어도 계속 현장에 머물며 스태프들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것도 송강호씨와 비슷해요(웃음).”


'1987' 김우형 촬영감독이 현지 촬영팀 지휘
촬영 현장에서 박찬욱 감독. 왼쪽은 이번 작품을 함께한 정원조 프로듀서다. [사진 왓챠]

70년대 배경의 여느 어두운 첩보물과 달리 총천연색 의상과 소품도 눈에 띈다. 박 감독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보고 반해 함께한 영국 미술감독 마리아 듀코빅의 솜씨다. 감독은 “79년 런던의 젊은 배우라면 80년대 유행을 이미 받아들였을 거란 미술감독 의견으로, 볼드한 블록컬러를 내세워 기존 70년대 배경 작품들의 보헤미안‧히피룩과 차별화했다”고 했다. 독일, 이스라엘, 레바논, 영국 등 변화무쌍한 무대는 실제론 영국‧그리스‧체코 세 나라에서 찍었다. 김우형 촬영감독이 현지 촬영팀을 이끌었다.

극이 진행될 수록 카메라는 더 높고, 더 넓게 세상을 담는다. 멀찍이 떨어져서 본 인물들은 인종도, 국적도 구분이 흐려진다. 이는 선악의 경계가 점차 무너져가는 이야기의 흐름과도 연결된다. 찰리는 유럽열강과 손잡은 이스라엘 정보국의 지휘에 따라 신분을 사칭하고 아랍 테러조직의 중심에 침투하는데, 점차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죽음은 계속된다. 방아쇠를 쥔 손만 달라질 뿐이다.


극장 미개봉은 뼈 때리는 고통
영국, 그리스, 체코 등 유럽 여러 풍광을 담은 장면들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박찬욱 감독은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 와이드스크린 화면비로 촬영해왔지만 방송이 목적이던 이번 작품은 BBC 내규에 따라 16대 9 비율로 촬영했다. [사진 왓챠]

Q : 다시 드라마를 연출할 수도 있을까.
A : “영화가 기껏 130분 분량인데 그안에 도저히 넣을 수 없는 꼭 하고 싶은 스토리가 있다면. 스트리밍 서비스 쪽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플랫폼 자체에 거부감은 없는데 ‘극장 상영’이란 굉장히 큰 희생이 따른다는 사실은 명심하고 있다. 뼈 때리는 고통이다. 웬만한 작품이 아니라면 잃고 싶지 않다.”

Q : 차기 행보는.
A : “할리우드 서부극을 염두에 두고 오랫동안 각본을 만지고 있다. 아직 확정단계는 아니다. 국내 작품으론 미스터리 수사물을 준비하고 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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