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받던 딸들의 반란, 정상회담서도 언급된 감동 실화
[오마이뉴스 조은미 기자]
종종 누가 가족관계를 물으면 하던 대답이다. 나는 1971년에 제주도에서 넷째 딸로 태어났다. 세상에 태어나서 아기였던 나의 첫 느낌은 무엇이었을까? 분명 환대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렸을 때 자주 들었던 말은 부모님도, 할머니도 무척 실망했다는 것. 넷째 딸은 정말이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 같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죄인의 오명을 벗은 건 2년 터울로 남동생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터를 잘 팠네." "얘가 돼지띠지? 역시 복덩이야." "이제 너희 엄마도 얼굴 들고 살겠네."
자라면서 들었던 무수한 차별과 멸시의 말들로, 세상과 남자에 대한 막연한 적개심이 자랐다. 특히 "말이나 소로 태어나지 못하면 여자로 태어나는 거지"라는 말은 치명적이었다. 며칠 전 본 인도 영화에서 익숙한 상황을 보았다. 간절히 아들을 원하지만 첫딸을 얻자, 아들을 낳으라고 온갖 비법을 전수하는 이웃 주민들. 딸을 내리 넷을 낳으며 풀이 죽는 부모. 이웃들의 비난 아닌 비난. 정말 나의 어린 시절과 비슷했다. (물론 인도의 이웃들처럼 아들 낳는 비법을 엄마가 전수받았을 리는 없다.)
가난으로 레슬링의 꿈을 접어야 했던 전직 레슬링 선수 아버지 마하비르 싱 포갓(아미르 칸 분). 어느 날 집에 와보니 씩씩대는 이웃이 있다. 자기 아들들이 이 집 딸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는 것. 온통 멍이 든 남자애들과 옆에 서서 어떻게 혼날까 마음 졸이던 딸들을 본 아버지에게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그래. 딸들에게 레슬링을 가르치자. 금메달을 따게 하자. 아들이든 딸이든, 금메달은 다 같은 금메달 아닌가.
인도의 시골에서 딸들을 레슬링 선수로 키우겠다는 아버지. 이웃들의 비난과 조롱이 얼마나 대단할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두 딸 기타와 바비타도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한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하늘을 찌를 즈음, 결혼한 친구가 말한다. 너희가 부럽고, 너희 아버지가 부럽다고. 인도에서는 16살만 되어도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해야 하고, 아기를 낳아 키워야 하고, 자기 삶이란 건 없는 거라고. 그런데 너희들은 하고 싶은 거 해볼 수 있지 않냐고. 친구의 말에 크게 깨닫는 바가 있어 딸들은 이제 훈련을 받아들인다.
인도 특유의 신나는 음악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장면들은 영화에 흥겨움을 부여한다. 기존 인도 영화들은 음악을 배경으로 (난데없이) 춤을 추는 장면이 많은데, 이 영화에서는 기타와 바비타의 훈련 장면 등이 펼쳐진다. 레슬링 시합을 뜻하는 '당갈'은 영화에서는 '싸우자' 같은 뜻으로 번역되었는데 관객들도 덩달아 자매의 투지에 참여하게 된다. 이 영화는 인도 역대 최고의 흥행을 거두었고, 중국에서도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심지어 시진핑 주석조차 인도 모리 총리와의 정상 회담에서 이 영화의 중국 흥행을 언급했다니 알 만하다.
여성의 눈으로 영화를 보면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다. 딸들의 성공은 아버지의 작품인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버지인가, 딸들인가? 이 영화를 두고 일종의 '여성주의' 영화로 볼 수 있을까? 어린 딸들에게 레슬러의 운명을 부여하고 훈련시키고, 꿈을 이루게 이끈 것은 분명 아버지가 맞다. 그러나 나는 인도의 현실에서 아버지가 부여한 기회를 강력한 의지로 성공으로 만든 딸들의 노력과 성장에 방점을 찍는다. 아버지가 시작한 꿈이고, 아버지의 꿈이었지만, 결국 딸들이 이루고 딸들의 꿈이 되었다.
스스로 서려면 아버지를 넘어서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극복은 두 번에 걸쳐 나타난다. 처음은 국가대표 선수가 된 기타가 고향에 내려왔을 때, 아버지와 시합을 겨루고 쓰러뜨리는 장면이다. 이것은 동생 바비타에게 나쁘게 비친다. 아버지를 (아버지가 가르쳐준 것들을) 부인하고, 밟고 넘어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진정한 넘어섬은 영연방 경기대회 결승전에서이다. 경기에서도 늘 아버지의 코치를 따랐던 기타가, 우연한 상황으로 아버지 '없이' 결승전을 싸워야 하게 된다. 기타는 자신에게 아버지가 가르쳐준 것을 복기하며, 자신의 의지로 마침내 승리를 거머쥔다. 기타는 그 승리가 자신만의 꿈이 아닌 수천 수만 명의 인도 딸들의 꿈이라고 생각한다. 마침내 기타는 아버지를 딛고 당당하게 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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